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유교/비판과 반론 (문단 편집) == 과학 발전 저해 == 유교라는 사상이 과학 발전에 걸림돌이 된 가장 핵심적인 요인은 논리학, 과학적 방법론의 부재이다. 서양 철학에서 찾아볼 수 있는 정밀한 [[논리학]]을 유교에서는 찾아보기 힘들다. 이는 유교의 고전이라 할 수 있는 논어, 맹자 등도 예외가 아니다. 오히려 유교에 묻혀버린 묵가, 법가 등에서 어느 정도 [[논리학]]의 씨앗이 보이는데 비해 유교의 경우 지극히 관념적이다. [[인도]] 철학에도 존재하는 논리학[* 기원전 6세기부터 논리학파가 등장하였으며 5세기의 철학자 진나 등장 이후의 신인명 논리학, 다섯 명제로 이루어지는 오분작법, 디그나가의 삼단 논법 등의 개념이 존재한다.]이 유교에는 부재한다. 단적인 예로 위키백과의 [[https://ko.wikipedia.org/wiki/%EB%85%BC%EB%A6%AC%ED%95%99%EC%9D%98_%EC%97%AD%EC%82%AC#%EC%9D%B8%EB%8F%84%EC%9D%98_%EB%85%BC%EB%A6%AC%ED%95%99|논리학의 역사]] 항목을 보면 [[기원전]]부터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를 시조로 삼아 [[이븐 시나]], [[르네 데카르트]], [[프랜시스 베이컨]]에 이르기까지 논리학을 꾸준히 발전시켜온 [[서양|서구]]와 이슬람에 비해 중국은 분량이 거의 없다시피 하다. 세 줄로 끝날 지경이다. 게다가 묵가, 법가의 [[한비자]], 명가의 공손룡 등의 인물의 연구 결과일 뿐 유교의 영향은 아예 없다. 과학의 언어는 수학과 논리학인데 [[동아시아]]에서 수학은 관에서 나랏일하는 도구나 선비의 취미에 불과할 뿐이었지, 우주의 진리를 재는 잣대가 아니었다. 유학자들은 수학을 바탕으로 주장을 입증하려 하지도 않았으며 특히 [[중세]] 이후의 성리학자들은 무엇보다도 논리학이 부재한 채 근거, 증명, 실험 없이 형이상학적 주장만을 반복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초기 유학자들은 난세를 개혁하기 위한 현실적, 실천적 합리성이 강했으나,[* 유학이 현실을 외면하고 공리공담만 일삼았다는 것은 성리학에서 기반한 편견이다. 아무래도 [[조광조]]같은 인물들이 [[송양지인]]스러운, 머릿속이 꽃밭같은 발언을 내뱉다보니 그런 이미지가 강하게 박힌 면이 있다. 하지만 [[춘추전국시대]]에서 [[한나라]] 시절까지의 유학자들은 대단히 실천적이고 과감한 사고방식을 지니고 있었다. 모사로서도 꾀를 잘 냈고 말재주 하나에 목숨을 건 채 [[제나라]]를 투항시킨 [[역이기]], 군무에 능하며 [[황건적]]을 잘 때려잡은 [[노식]] 같은 인물들이 대표적인 사례다.] 유학에 내재된 합리성이란 [[괴력난신]]이나 [[미신]]을 멀리하고 현실 세계에서 실천적 삶의 방식을 계몽하는 것이었다. 다시 말해 인간의 사회적 상식에 따르는 합리성에 가까운 것이었으며, 과학과 수학으로 얻어지는 합리성이 아닌 것이다. 즉 동아시아의 유교는 관념 일변도였다. 과학적 방법론이 부재하고 실험과 실천도 없으니 과학적인 탐구와 사고실험, 그에 따른 과학적 결과도 나올 수가 없던 것이다. 여기에 반론을 내놓는 사람들은 중국이 [[종이]], [[화약]], [[나침반]], [[인쇄술]]로 대표되는 4대 발명으로 유명하다는 것, [[송나라]] 시절에는 [[톱니바퀴]]를 이용한 [[물시계]]를 만드는 등 상당한 수준의 기술적 성취를 이뤘다는 점을 근거로 들기도 한다. 이런 사례는 유교 사회 아래에서도 과학적 발명이 이루어질 수 있다는 증거로 쓰이곤 한다.[* 다만 송나라가 [[산업혁명]]을 해낼 법한 잠재력이 있었다는 평가는 과장되었다는 것이 중론이다. 송나라에서 성행하던 수력 방적기나 물레방아, 제철 방식이나 석탄 이용은 유럽마냥 딱 중세 수준의 기술이었지 시대를 초월한 고도의 기술력이 아니었다.] 그러나 동아시아 사회는 논리학의 부재 때문에 단순 반복적 개량이나 우연적 발견 이상의 영역, 고도의 실험과 증명, 통계가 요구되는 영역으로는 결국 나아가지 못했다는 평가가 많다. 과학적 방법론이 부재하고 실험과 실천도 없으니 과학적인 탐구와 사고실험, 그에 따른 과학적 결과도 나올 수가 없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유교가 지향하는 사회는 근본적으로 요순시대를 이상향으로 삼고 복고적, 과거회귀적 성향을 띄게 된다. 유교는 답을 현재와 미래가 아닌 과거 요순시대에서 찾는다. 공자부터가 '요순을 근본으로 삼고 문무를 본받는다'고 강하게 주장한 인물이었다. 시조가 이 정도이니 유교=복고라고 봐도 좋을 정도로 유교의 과거회귀 성향은 뿌리 깊게 박힌 근본이 되어버렸다. 이런 사회에서는 검소한 삶과 함께 [[작은정부]]를 추구하게 된다. 유교는 백성이 고달프지 않게 일 벌리지 않고 사회를 유지만 하는 정부의 역할을 강조하며 새로운 문물이나 제도, 유교 경전에서 유래하지 않은 사회적 변화를 꺼린다. 게다가 [[장인]]과 [[상인]]이 대접받지 못하거나 일정 역할은 하더라도 천시받는 경향이 있었다.[* 상인이라는 말 자체가 천대적인 의미가 있다. 주나라가 건국된 뒤 망국의 후예인 상나라 사람들은 상업 외에 종사할 분야가 없었는데, 상나라 사람이나 하는 일이라는 의미에서 상인이라는 말이 생겨난 것이다. 상인은 불명예스런 직업이라는 인식, 즉 상인 천대는 전 세계적으로 보이는 경향이지만 동아시아 문화권은 그 정도가 더했다. 유교 뿐만 아니라 상앙의 법가 사상에서도 농촌 중시와 함께 상인 억압을 크게 강조하는데, 이런 전통이 중세까지 이어지며 주자학, 성리학에도 인입된 것으로 보인다. 물론 서구에서도 중세 초까지 상인은 하위 계급이었던 것은 같다. 그러나 상업과 도시 문화권, 상품경제와 선박무역이 발전하며 상인의 지위가 크게 상승했다는 차이가 있다. 물론 상업이 아무리 발달하더라도 [[베니스의 상인]] 같은 작품에서 알 수 있듯이 시세차익을 취하는 상인 계급에 대한 거부감은 여전했다. 그러나 [[한자동맹]], [[베네치아]]나 [[제노바 공화국]]같이 상인 공화정이 있을 정도였으니 상인의 실질적인 지위는 낮지 않은 편이었고 거물 상인은 [[귀족]]과 같은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었다.][* 국가적 정책 차원에서도 볼 때 성리학적 전통이 후기까지 매우 강하게 보존된 조선의 경우에는 백성들 가운데서 게으르고 놀기 좋아하는 자들이 모두 공(工)과 상(商)에 종사하였으므로 농사를 짓는 백성이 날로 줄어들었으며 말작(末作)이 발달하고 본실이 피폐했다.라는 [[정도전]]의 사상처럼 상업을 억제하려는 경향이 매우 강한 편이었다. 명을 건국한 [[주원장]]도 상업을 불신하고 농촌 위주의 사회를 지향했으며 후기 명에서 경제가 발달하며 국가적 부를 거머쥔 거상들이 나타나긴 했으나 이것은 상세를 거둠으로 충당하는 세수 등의 현실에 타협한 결과이지 국가적 방향성의 변화라기에는 무리가 있는 부분이다. 경제가 미약하게나마 발달한 후기 조선 또한 마찬가지. [[자본주의 맹아론|자본주의의 맹아로]] 포장된 조선 실학자들 역시 실상은 유학자로서 상업을 '말업'이라 천시하거나 성호 [[이익(실학자)|이익]]처럼 폐전론을 주창하며 시장을 날려버리자고 하는 등 대다수가 억말론을 강하게 주장한 편이었다. 성리학에 비교해서 오히려 초기 유교가 공자의 제자 [[자공]]이 상인인 사례에서 알 수 있듯이 아주 상업을 깔아뭉개진 않았던 편이었다. 물론 유학자나 농민에 비해 상인이나 기술자를 천하게 본 것은 마찬가지다. 반면 유사한 시기, [[르네상스]] 이후의 서구 사회는 상업을 인위적으로 밀어주지는 않거나 무관심할지언정 상인을 때려잡자는 식으로 굴지는 않는 편이었다. [[중농주의]] 학자나 관료들이 상업을 억제하는 법안을 낼 지라도 [[중상주의]]가 힘을 잃고 소멸하지는 않는 식으로 서로 영역을 구축하며 견제했던 셈이다. 또한 시간이 흐르고 [[절대왕정]] 시대가 되면 [[콜베르]] 등의 관료들이 중상주의 정책을 추진하는 경향이 드러난다.] 서양 귀족들의 사치에서 나온 상, 공인의 이익이 과학 발전에 도움이 되었다는 시각에서 볼 때 이처럼 검약과 사치 금지를 강제하는 유교는 확실히 과학 발전을 저해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서양의 과학 발전사를 통해 비교해 보자면, 과학자들의 시초인 [[연금술]]사들은 납을 금으로 바꾼다는 허황된 꿈이 아니라면 사실상 돈이 나올 구석이 많지 않았다. [[특허]]제도가 갖춰지기 전이라 아이디어의 사용권 판매 등을 통해 돈을 뽑아낼 구석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서양 귀족들은 자신들의 돈으로 독특한 기계들이나 취미, 전쟁 용품을 구매하여 서로 경쟁하면서 기술 발달에 기여했다.[* 상당한 노동력과 기술력이 필요한 초창기의 [[화승총]]과 같은 개인화기, 또는 풀 플레이트 아머가 귀족층을 중심으로 발달하며 널리 사용되기 시작했다.] 이를 통해 당시의 연금술사들은 안정적인 수입을 얻으며 기술 발전에 전념할 수 있었다. 하지만 겉으로나마 근검절약을 강조하던 유학자들이 기득권이던 동양에서는 이같은 사치와 욕망 추구를 통한 과학 발전은 힘들었던 측면이 크다. 과학의 발전은 인간의 욕망, 더 나은 삶에 대한 욕구, 지식에 대한 야망에서 나오는데 유교적 윤리와 가치관은 이를 가로막는 면이 크다는 점을 부인하기 어렵다. 조선의 경우도 전술한 바와 같이 대부분의 유학자가 부의 추구와 사치를 죄악시했다. 조선 [[성종(조선)|성종]]이 궁궐에 구리 수로를 좀 깔은 것 가지고 대간들이 잡아먹을 듯 달려든 것을 보면 잘 알 수 있는 사실이다. 해당 사례처럼 유학자들은 사치 없이 자급자족하는 작은 농본국가, 즉 [[요순시대]]를 이상향으로 삼았다. 이렇게 과거 회귀와 [[복고]]를 주장하니 새로운 기술을 추구하는 지식인도 줄어들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귀족이나 왕의 호기심일지언정 작은 수로라도 깔아보는 사회여야 수로 기술이나 상하수도도 발전하는 법인데, 유교는 그런 변화를 기대하기 어려웠던, 경전에 의거하지 않은 변화나 시도를 엄격히 [[검열]]하는 학문이었음이 자명하다. 조선 후기의 [[실학]]은 동아시아의 내재적 과학 발전의 사례로 꾸준히 제시된다. 하지만 그들의 상당수가 비주류거나 재야 연구자였다. 간혹 특정 실학자가 명문가 출신이거나 관직에 올라 어느 정도의 고위직에 올랐다 한들[* [[정약용]], [[박제가]] 외에도 [[이가환]], [[서유구]], 이서구가 [[판서]]직에 오른 바 있다.] 국가의 방향성을 바꿀 정도의 영향력은 가지고 있지 않았으며, 어디까지나 실험 정도에 그쳤다. 실학자 중 상당수의 주장이 실상 성리학에 근거하며 상업을 억제하는 억말론, 폐전론 등을 주장했다는 점, [[정전제]] 같은 은주시대에 근거한 철저한 유교적 현실개혁을 주창했음을 고려하지 않더라도 정치세력화 할 수 없는, 상대적으로 미미한 집단이었던 것이다. 그러니 조정의 현실정치에 그들의 개혁 사상을 적극적으로 반영할 도리가 없었던 것. 유럽처럼 과학자, 장인, 상인, 공인이 능동적으로 삶을 개척하며 다수가 주류가 되어 사회를 변혁시킨 사례와 조선의 실학은 동등하게 비교하기 힘든 것이다.[* 실학보다 더 적합한 사례는 일본의 난학이다. [[난학]]은 전국적으로 전파되며 성행하였다. 보수적 성향의 막부가 난학을 금하려 하긴 하였으나, 일단 [[에도 막부|막부]]가 해당 학문에 반응을 보일 정도라는 건 증명이 되므로 사회에 상당한 변화를 일으켰다고 볼 수 있으며, 이는 [[메이지 유신]]이 가능하게 했던 기반으로 평가받고 있다.] 마찬가지로 [[세종(조선)|세종]], [[문종(조선)|문종]] 시기가 조선사에서 이질적인 시대였을 뿐이지 [[사림]]이 집권한 뒤에는 기술을 잡기 취급하며 과학에 철저히 무관심한 경우가 많았다. 물론 유학자들이라고 바보는 아니니 해외에서 [[조총]], [[홍이포]], [[감자]], [[고추]] 같은 신문물이 들어오면 뜯어보고 효용이 있는지 연구해 보는 정도는 하긴 했다. 그러나 운 좋게 유입된 외부 문물을 수동적으로 복제하고 그대로 쓰는 것에서 그쳤지, 그 문물을 토대로 새 영역을 개척하고 발전시킨 사례는 거의 없다. 서구에서 [[머스킷]]이 후장총, [[기관총]]으로 발전하는 사이 조선과 명, 청에서는 화승총을 근본적 개량 없이 마르고 닳도록 쓴 사례에서도 알 수 있는 부분이다.[* 물론 조선에서도 [[천보총]] 같은 시도는 있긴 했다. 조선에서 화기 개량에 대한 의지가 있었다는 증거다. 그러나 천보총의 경우 조총과 메커니즘이 완벽하게 동일한 상태로 총열 길이를 수정하여 사거리를 늘린 정도로 추정되는 총이며, 뇌홍이나 화약, 탄환 발전, 장전방식 변경 같은 신개념의 등장이라고는 보기 힘들다. 신기술이 등장할 사회적 토양, 화학이나 기계공학 등의 발전이 없었기에 어쩔 수 없는 일이었기는 하다. [[플린트락]] 유입의 사례에서도 조선은 플린트락의 효용성은 인식했으나 국가예산, 심각한 자원 부족과 기계공학 기술 부족으로 플린트락을 도입할 수 없었다. 당시까지는 플린트락의 가성비가 조총을 압도하지 못했으므로 플린트락을 도입하지 않은 건 조선의 예산사정으로는 합리적인 결정이긴 했다. 그러나 애초에 기술 격차와 처참한 무역 능력 탓에 시도조차 어려웠던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개머리판이나 총검 도입 같은 기술격차가 적은 발상의 영역에서도 동양이 발전하지 못한 것은, 기술의 문제보다는 과학적 탐구정신의 차이라고도 볼 수 있는 부분이다.] 조선이야 자원이 부족했지만 명, 청의 경우 자원이 부족할 것도 없고 외부 유입이나 교류가 적지도 않았다. 돈이나 사람이 모자란 것도 아니었으며 전쟁이 없었던 것도 아니었다. 그러나 새로운 발견과 도전을 하도록 이끄는 사회문화적 동기부여가 매우 부족했던 것이다. 장인의 기술을 천하게 취급하며 어쩔 수 없이 사회에 필요하긴 하지만 유자가 나설 영역이 아니라고 벽을 치는 게 유교의 세계관이었다. 그런 마당이니 발전이 있었을 수가 없다. 조선 중, 후기 당대 유학자들의 핵심 관심사는 이기론, 북벌, 호락논쟁이니 하는 것들이었고, 관념적 탐구에만 철저히 몰두했다. 수학이나 천문을 연구하는 학자가 간혹 나온다 한들 개인 차원의 취미에 그칠 뿐이었다. [[교과서]]나 [[백과사전]]에는 정약용이 기계를 다루는 이용감을 두자고 주장했다는 내용이 나오지만 이용감이 실제로 설립된 바는 없고, 조선에서 기계 연구를 본격적으로 해 성과를 낸 사례도 딱히 없다.[* 조선에서 기계공학의 발전이 미진했던 것은 자연환경의 영향이라는 분석이 많다. 서양의 경우 농지에 물을 공급하기 위해 [[수차]]를 적극적으로 이용했는데 이 과정에서 엄청난 기계공학의 발전을 이룩해냈다. 수차를 통해 만들어낸 에너지로 제분업부터 시작하여 광산업, 직물, 종이, 금속 가공을 해내 동력과 에너지에 대한 이해도가 아주 높아진 것이다. 이렇게 축적된 기계공학적 발전으로 유럽 세계는 매우 정교한 [[시계]]를 만들어내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유럽과 비교해 조선의 하천은 하상계수 문제로 [[물레방아]], 수차를 운용하기에 매우 열악한 환경이었다. 물레방아를 소수 쓰기는 했으나 쓸 수 있는 지형이 극히 한정되어 있었고 효과도 적었다. 이처럼 필요가 적으니 노력의 투입과 발전도 적을 수 밖에 없는 것.] 정약용이 거중기를 개발했으나 거중기를 바탕으로 기계공학이 부흥한 바도 없고, 다른 지식인들이 그런 발견에 감명받고 노력했다는 사례도 없다. 그저 학자 혼자의 개인기였을 뿐이었다. 조선왕조실록을 봐도 신하들은 왕, 후계자의 관심사를 철저하게 [[사서삼경]]과 대학연의 등으로 돌리고 다른 기술은 잡기 취급하며 관심사가 다른 곳으로 돌아가는 것을 꺼렸다. 왕 뿐만 아니라 유학자들이 후대를 양성하는 과정도 마찬가지였다. 게다가 사농공상적 질서 아래에서 기술자나 상인은 낮은 계급으로 취급했고, 장인들은 신분상승이나 부, 욕망의 실현 가능성이 없으니 혁신 없이 시키는 일이나 반복하는 처지였다.[* [[연은분리법]]같은 예외가 있긴 하나 이와 같은 유례를 조선사에서 찾기 힘들다.] 이처럼 근검절약을 강조하던 유학자들이 기득권이던 동양에서 사치와 욕망을 통한 과학 발전은 힘들었다는 것이 사실이다. 유교에서 과학을 연구한다고 사형에 처하지는 않을지 모르겠으나, 애당초 과학을 연구하려는 동기부여 자체가 적으니 분쟁이 벌어질 이유도 적은 것이다.[* 혹자는 서구 기독교 문명이 유교 문명에 비해 과학을 탄압하는 성질이 있었다고 비판하기도 한다. 그러나 그런 시각은 1980년대 [[갈릴레이]] [[위인전]]에나 나올 법한 고리짝적 도태된 관점, 세간의 속설이나 야사에 불과하다. 애초에 교회에 의해 핍박받은 과학자의 사례를 꼽기 힘들다. 갈릴레이의 사례가 그나마 비슷한 사례이지만 종교적 이유보다는 갈릴레이의 오만함이 더 큰 문제였다. 애초에 교회가 천동설에 딱히 집착할 이유가 없었고 충분한 근거가 나오면 기존 학설을 폐기할 수 있다는게 기본 입장이었다. 교회는 가설 차원에서 지동설을 논의하는 것을 허용했고 가설인 것을 명시하면 학생들에게 가르칠 수도 있으며 출판물을 낼 수도 있다고 명시했다. 이처럼 교회는 전혀 교조적인 태도를 보이지 않았고 옳고 그름의 차원에서 논쟁한 것. 그러나 기존 이론을 폐기하기 위해서는 정밀한 관측 데이터가 필요했는데 당시 시점에서는 자료가 부족한 상황이었다. 그러나 갈릴레이는 자신의 이론을 가설 차원으로 국한하는 것에 불만을 가졌고 이 과정에서 교회의 관계자들과 인간적인 갈등이 일어났다. 즉 갈릴레이의 오만한 성격, 타협능력 부족 같은 정치력의 부족이 탄압의 가장 큰 원인이었다. 실력만 있고 사회성이 부족한 학자가 따돌림 당하는 건 현대 학계에서도 비슷하게 일어나는 일이다. 갈릴레이 재판도 권위있는 학술 아카데미 내에서의 내부 논쟁에 가까운 것이었다. 종교를 떠나 교회가 학문과 이론의 검증을 관장하는 최고 지식인 집단이었기에 일어난 일에 불과한 것. 우선 똑같이 지동설을 연구한 [[요하네스 케플러]]는 전혀 탄압을 받지 않았고 [[코페르니쿠스]]는 아예 주교였다. 로저 베이컨, 니콜라스 오렘, 알버트 매그너스, 존 페컴, 토마스 브래드워드, 월터 벌리 등등 무수한 학자들이 교회와 별 대립 없이 무난하게 학문을 연구하며 잘 살았다. 이처럼 과학자들은 교회의 지원 하에 따뜻하게 연구할 수 있었다. [[그리스]]로부터 전수되어온 고등학문을 보존하는 당대 최고의 학술 연구 기관이 [[교회]]였으니 지식인이 거기서 배우고 연구하는 게 당연했던 것이다.] 꾸준히 일관되게 사회 하층민의 잡기 취급하는데 어떻게 야심과 재능이 있는, [[프랜시스 베이컨]], [[아이작 뉴턴]]이나 [[하위헌스]] 같은 인재가 참여하고 발전이 있을 수 있겠는가. 이에 비견되는 조선의 [[이황]], [[이이(조선)|이이]], [[송시열]] 같은 뛰어난 두뇌를 가진 인재들은 모조리 성리학적 담론에 몰두한 것이 현실이었다. 상류층을 제외하고 봐도 중세 유럽에서 명망있는 장인이나 상인은 부를 얻고 도시의 유지로서 행정에도 큰 영향을 미쳤는데, 조선의 장인은 그저 할당된 생산량이나 찍어내는 노동자일 뿐이었다. 결과적으로 동아시아에서의 과학 발전은 [[연은분리법]]의 발견처럼 우연히, 혹은 [[이상주의|유교적 이상을 추구하는]] 과정에서 일부 이루어지긴 했다. 예를 들어 조선의 주요한 과학 업적들을 살펴본다면, 조선 초기의 [[측우기]]나 [[혼천의]] 같은 관측기구, 역법 개정, 지리지 제정 등의 발전은 대부분 농본국가에서 농업을 지원하고 국가 체계를 구축하기 위한 과정의 일환이었다. 다시 말해 우주나 자연법칙 자체에 대한 지적 탐구와 거리가 좀 있다. 조선의 과학은 농업, 천문 등 유교 사회에서 농사짓고 나라 돌리는데 필수적인 영역에서만 일정 수준의 발전이 있었을 뿐이었다. 그 외의 군사나 수학 같은 분야의 독자적인 발전은 조선 초기의 세종, 문종 시기에 국한되었다. 문종 사후 사림이 집권한 뒤 조선 사회는 중국이나 일본을 통해 유입된 외부의 지식을 분석하고 복제하는 정도에 그쳤다. 그 외에 유학적 지식이나 세계관과 관계 없는 화학, 물리, 기계공학, 건축, 통신, 에너지, 산업 등의 분야에서는 암울할 정도로 발전이 미미했던 것이 현실이다. 정리하자면 과학 발전의 토대라 할 수 있는 사치, 욕망에 대한 [[금기]], 국력진흥과 기술에 대한 거부감, 무엇보다도 논리학과 실험, 증명정신 부재로 인하여 유교적 이데올로기가 과학 발전에 지장이 되었음은 일정 부분 사실이라고 볼 수 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